에피쿠로스
Fig.1 에피쿠로스 쾌락, 현대지성, 에피쿠로스의 네 가지 처방, 복복서가
요약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짧지만 어려운 질문에 어떤 답변들이 있을까 해서 에피쿠로스 학파를 겉핥기 공부를 했다. 전에 “명상록Meditations”과 “명상록 수업The inner citadel”을 통해 스토아 학파를 간략하게 공부했는데, 당대에 경쟁했던 또 다른 철학 사조인 에피쿠로스 학파에 관심이 생겨서 관련 책을 조금 읽고, 그 내용을 요약하고, 짧은 생각을 적어 보았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오명을 많이 받아 온 철학 사조이다. 영단어 ‘epicurean’은 향락적인, 육체적 즐거움과 관련된 쾌락주의의 뜻을 가지고 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쓴 “에피쿠로스의 생애”에서 당대의 수많은 철학자들도 쾌락이라는 이름 때문에 향락적이고 퇴폐적이라며 비판해 온 바 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니 에피쿠로스 학파는 향락적이거나 퇴폐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스토아 학파처럼 금욕적이면서 정신적인 평안을 찾고 과도한 쾌락의 추구에 있어서는 경계하는, 스토아 학파와 비슷한 면을 갖는 철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점에서 흥미를 가졌고, 이에 이 글에서는 스토아 학파와 어떤 차이를 갖는지 알아보고, 그리고 현대에 적용할 때 어떤 문제가 있을지 생각해보려고 한다.
이 글에서 참조하는 에피쿠로스 학파에 관한 해설서는 “에피쿠로스의 네 가지 처방: 불안과 고통에 대처하는 철학의 지혜”이며, 원전은 현대지성의 “에피쿠로스 쾌락”으로,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 에피쿠로스의 생애
- 헤로도토스에게 보낸 서신
- 피토클레스에게 보낸 서신
- 현자론
-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낸 서신
- 주요 가르침들
- 에피쿠로스 어록
내용
쾌락과 평정
에피쿠로스는 고통이 없는 상태를 쾌락이라고 정의하고, 이를 정적-동적 그리고 육체적-정신적으로 총 네 가지 쾌락으로 구분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정적인 정신적 쾌락 즉 평정ataraxia,ἀταραξία을 만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동적인 쾌락은 행위를 했을 때 느끼는 쾌락이고, 정적인 쾌락은 어떤 상태에 도달했을 때 느끼는 쾌락이다. 식사를 예로 들면, 맛있는 것을 먹을 때의 쾌락을 동적인 쾌락이라고 하고, 먹고 나서 배고프지 않은 상태에 있을 때를 정적인 쾌락이라고 한다.
동적 쾌락과 달리 정적 쾌락은 고통이 없는 완성된 상태이므로, 더 이상의 증가는 필요하지 않으며, 과도한 자극은 오히려 고통으로 이어질 수 있다. 맛있는 것을 적게 먹는 것보다는 많이 먹는게 육체적 쾌락을 더 느끼겠지만, 한 번 포만감을 느낄 정도로 먹고 나면 더 먹어도 정적인 쾌락이 더 증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과식을 하게 됐을 때 불편한 상태가 되면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정적인 정신적 쾌락, 즉 근심과 걱정 등의 정신적 고통 없이 평온한 상태에 이르는 것을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단기적인 육체적 고통은 정신적 쾌락을 위해 인내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예를 들어 해야 할 것을 안하고 놀았을 때, 육체적으로는 즐거울 수 있으나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서 생기는 불안감이 생길 수 있다. 이를 참고 해야 할 일을 해냈을 때의 정신적 쾌락, 즉 평온한 상태를 이루는 것이 그 때 잠깐 육체적 쾌락을 즐기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쾌락에 있어 절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쾌락은 단순한 감각적 즐거움이 아니라,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불안이 제거된 상태이다. 이 점에서 에피쿠로스는 고통의 상태를 개선할 정도만의 쾌락을 추구하는, 절제된 쾌락 추구를 중요하게 여겼다.
우정
에피쿠로스는 우정에 대해서도, 서로에게 신뢰와 안정감을 줄 수 있고 같이하는 그 자체로 정신적 행복을 주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고 그 덕분에 평정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여겼다.
네 가지 처방
에피쿠로스 철학의 네 가지 처방Tetrapharmakos,τετραφάρμακος은 다음과 같이 알려져 있다.
신을 두려워 마라.
죽음을 염려하지 마라.
좋은 것은 구하기 어렵지 않으며,
끔찍한 일은 견디기 어렵지 않다.
신에 대한 관점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에 의하면, 에피쿠로스의 신에 대한 해석은 ‘살아 있고 불멸하며 축복받은 행복한 존재τὸν θεὸν ζῷον ἄφθαρτον καὶ μακάριον’이며, 본성적으로 고통과 불안을 모르는 완전한 평정 속에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어서 인간의 주관적인 선악의 기준을 꼬집으면서 권선징악의 신을 부정한다. 즉슨, 사람은 으레 자신이 좋게 생각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그렇지 않은 이질적인 것은 거부하기 마련이고, 이에 사람들은 신들이 선한 자에게는 도움을, 악한 자에게는 징벌을 내릴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이를 부정하고, 신은 그저 불멸하고 축복받은 행복한 존재라고 역설한다.
죽음에 대한 관점
에피쿠로스의 죽음에 대한 관점은 좋거나 나쁘지도 않은 것이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는 것으로 평안에 이르는 것에 의미가 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은 감각에 달려 있지만 죽음은 감각의 박탈이기 때문에, 죽음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다. 그리고 산 자에게는 아직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은 자는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은 의미가 없으니,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이는 루크레티우스Titus Lucretius Carus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에서도 대칭 논증Lucretius’ symmetry argument으로 다시 언급되었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이 죽은 후의 존재의 상실이라면, 태어나기 전에 우리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도 두려워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 않듯이, 죽음에 대해서도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 생각
쾌락과 평정
에피쿠로스 철학은 고통의 부재가 쾌락이라고 정의하는 점에서 공리주의의 토대가 되기도 했으나, 이는 개인에 적용하기보단 법철학에 적용하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공리주의는 에피쿠로스 철학처럼 고통이 없는 상태가 쾌락이라는 정의를 내린다. 즉, 쾌락의 적극적 추구가 아닌 고통의 제거가 목표인 것이다. 하지만 이 점을 개인에 적용하기 어려운 점은, 현대 연구에서는 행복한 사람들이 대개 활동적이고, 긍정적 정서와 부정적 정서가 서로 독립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3]
절제된 쾌락의 추구에 대한 논리는 스토아 학파와 유사한 느낌이 들었는데, 과도한 쾌락의 추구는 오히려 고통을 가져온다는 주장에서 특히 그렇다. 부의 증대는 곧 부의 상실에의 근심을 불러일으키므로 궁극적 행복이 아니듯이, 과도한 쾌락의 추구는 상실의 불안을 가져온다는 논리는 “철학의 위안De consolatione philosophiae”에서 본 것과 유사했다. [4]
신에 대한 관점
스토아 학파로 알려진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서 자주 신을 두려워하라고 나온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어서 이 차이점을 확인해봤다. 아우렐리우스가 신을 두려워하라고 한 의도는 무엇이고, 에피쿠로스가 신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 의도는 뭘까?
아우렐리우스의 신에 대한 관점은 전통적인 인격신보다는, 우주를 관통하는 이성(λόγος, logos)에 대한 경외에 가깝다. 스토아 학파의 신은 우주를 지배하는 이성적 질서이자,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보편 이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5]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므로, 자신의 이성에 따라 살아가는 것, 즉 자연의 질서에 조화를 이루는 것이 곧 절대선이며, 궁극적인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견해이다. [4]
에피쿠로스의 신에 대한 관점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는데, 전통적인 신의 개념인 ‘인간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신’이 아닌, 완전하고 불변하며 평정에 이른 존재이다. 따라서 신은 인간 세계의 사건들에 개입하지 않으며, 인간은 신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에피쿠로스는 이러한 신 개념을 통해, 종교적 공포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정과 행복한 삶을 추구할 것을 강조하였다. [1-2]
죽음에 대한 관점
죽음에 대한 관점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는 데에는 좋아 보이지만,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옹호하는 것은 아닐까, 해서 이에 대한 생각을 조사해 보았다. 이렇게 생각한 까닭으로는 쾌락주의의 후신인 공리주의, 그 중에서도 소극적 공리주의 때문이다. 소극적 공리주의는 행복과 불행의 최대 차이를 내는 것 보다는, 불행의 총합을 줄이는 것을 중요시하는 철학 사조이다. 하지만 단순히 불행의 총합을 줄이는 것이 목표라면, 세계 멸망 또한 도덕적 행위가 된다는 세계멸망 논증The World Destruction Argument으로 반박된다는 철학 사조이기도 하다. [6] 이와 비슷하게,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고 지금 내가 극심한 정신적 고통에 빠져 있는 상황이라면, 죽음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서이다.
하지만 W. Englert에 따르면 에피쿠로스 학파는 자발적 죽음에 부정적이었으며, 오히려 스토아 학파에서 몇몇 상황에 옹호했으며, 대표적 예로 제논Zeno of Citium과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가 있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이상적인 현자는 운명에 대해 완전히 무적invulnerable이 되며, 쾌락과 고통의 주인이 되어 항상 그 균형을 이루어 평정에 이른 사람이므로, 결코 죽음을 선택할 이유가 없으며 오히려 고통에 대한 패배로 간주하는 것이다. 하지만 스토아 학파에서는 덕virtue의 실천을 위해서는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7]
루크레티우스의 대칭 논증의 주된 반박은 어떤 것이 있을까 확인해보니, EBS의 “위대한 수업”에서 셸리 케이건이 소개한 “박탈 이론deprivation account”이 있다. 즉, 우리는 삶에서 있던 행복을 죽음 이후에는 누릴 수 없으니 행복을 박탈당한 것 때문에 죽음은 나쁘다는 것이다. [8] 이 쪽은 우리가 죽음을 본능적으로 꺼려하는 이유로 설명할 수 있겠으나, 루크레티우스의 대칭 논증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내는 것이 목적이니, 죽음에 관한 철학을 전공하지 않는 이상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부분일 듯 하다.
결론
에피쿠로스 학파의 쾌락에 대한 관점은 금욕적이되, 금욕을 강제하지 않고 평정에 이르는 것을 중시한 것이 내 삶에서 본받을 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스토아 학파에서의 금욕은 이성을 강조하며 감정과 충동에 의한 쾌락 추구를 절제하는 것이며, 이는 “명상록 수업”에서 F. Ollier의 “Le Mirage spartiate”를 인용하며 이러한 금욕적 생활을 ‘스파르타의 허상’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에피쿠로스 학파의 금욕은 인간의 기본적인 쾌락의 추구를 받아들이되, 과한 쾌락의 추구는 고통을 불러오니 평정에 이를 정도의 적절한 양의 정신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다 받아들이기 쉬운 편이었다.
예를 들면 커피나 맛있는 음식 등에 대한 욕구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참느냐로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스토아적으로,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커피는 잠깐 각성 효과를 주지만 장기적으론 의존증이 생기고, 맛있는 음식도 그에 따른 식비와 다시 닭가슴살식으로 돌아왔을 때의 역체감을 생각하면 참는 편이 낫다. 하지만 현실의 내가 항상 이성으로 본능을 설득하기에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에피쿠로스적으로 생각하면, 내가 평소에 커피를 적게 마시고 닭가슴살식을 하는 것은 항상 커피나 맛있는 음식이 있지 않아도 나는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고, 필요할 때 커피나 맛있는 음식을 똑같이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니, 이 쪽이 보다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에 대한 관점도 본인이 이공계여서 그런지 스토아 학파나 기독교적 시선보다는 받아들이기 쉽다는 생각이 들고, 또 조금 확장해서 생각해보면 이러한 태도는 ‘신’에도 적용할 수 있지만 ‘살면서 마주하는 다양한 사건들’로도 해석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스토아 학파적으로 생각하면, 삶의 다양한 사건은 이성에 의한 것이고,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사건과 어찌할 수 없는 사건을 구분하고 그 사건을 사랑하며 받아들이며 최선의 이성적인 대처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성적인 흐름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도 많고, 그 원인을 파악하기 힘든 사건도 많다. 그리고 이공계에 몸담고있던 시간이 길었던 탓에, 에피쿠로스의 자연학을 활용한 사건의 해석에 보다 친근감이 더 가는 편이다.
죽음에 대한 해석도 평소에 안락사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기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다만 윤리의 관점에 있어서는 에피쿠로스 학파보다는 그 후신인 공리주의로, 그리고 개인적인 단위에서의 윤리는 스토아 학파적인 관점이 보다 합당하고, 법철학이나 국가 정책 등 집단적 단위에서의 윤리에 있어서는 공리주의적 관점이 보다 합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쾌락주의가 우정을 강조하기는 했으나 타인에 대한 고려는 다소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고, 그 점에서 공동체와 공공선을 중시하는 스토아 학파가 보다 개인적 단위에서의 윤리관에 알맞다는 생각이 든다.
결론적으로, 이 책을 읽은 원 목적인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이성을 중시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스토아 학파적 관점을 유지하되 금욕, 사건에 대한 해석 그리고 죽음에 대한 관점에서는 에피쿠로스 학파적 관점을 참조하는 것도 괜찮아 보인다는 생각이 든다.
참고문헌
[1] 에피쿠로스 쾌락(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2022.
[2] J. Sellars, 에피쿠로스의 네 가지 처방: 불안과 고통에 대처하는 철학의 지혜. 복복서가, 2022.
[3] Bergsma, A., Poot, G. & Liefbroer, A.C. Happiness in the Garden of Epicurus. J Happiness Stud 9, 397–423 (2008). https://doi.org/10.1007/s10902-006-9036-z
[4] Boethius, 박문재, Transl., 철학의 위안, 현대지성, 2018.
[5] P. Hadot, 이세진, Transl., 명상록 수업, 복복서가, 2023.
[6] W. Nigel, Philosophy: The Basics, 최희봉, Transl., Paju, Korea: 자작나무, 1997.
[7] W. Englert, “Colloquium 3: Stoics and Epicureans on the Nature of Suicide,” in Proceedings of the Boston area colloquium in ancient philosophy, 1994, vol. 10, no. 1, pp. 67-96: Brill.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