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라리스
Fig.1 솔라리스, 민음사
이동진 평론가는 ‘좋은 영화는 어떤 영화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다양한 답변 중에서, “두 번 시작되는 영화가 좋은 영화다” 라는 답변을 남긴 적이 있다.[1] 영화에 여운을 느끼고, 복기하고, 곱씹어보게 되는 영화를 의미하는데, 개인적으로는 “멋진 신세계”, “화씨 451”, “장미의 이름”, … 그리고 오늘 다룰 “솔라리스”가 그런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경험의 폭이 좁은 필자가 보기에도 다양한 요소를 다룰 수 있을 것 같아 보였으니, 사람마다 서로 다른 해석을 낼 것 같은 소설이다.
SF는 철학적 담론의 좋은 수단이 되어 왔다.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인간 인지의 한계를 보여주면서 대중에게 불가지론이나 회의주의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남겨두었고,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에서는 인간성에 대해 다루면서 윤리학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남겼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필자는 “솔라리스”는 ‘인간이 미지의 존재와 접촉했을 때의 감정, 행동, 그리고 사건을 냉담하게 다루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Fig.2 행동 양식이 판이하게 다른 사람에 우리는 충격을 받는다
우리는 미지의 대상에 대해 우리와 같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고대부터 인간은 신에게도 인격을 부여하고, 동물의 행동도 인간처럼 해석하고, 어떤 때는 무생물도 인간처럼 대한다. 단순히 인간으로 대하는 것을 넘어, 사람을 마주할 때도 상대가 나와 비슷한 성장 배경이나 가치관을 가졌다고 생각하고 행동을 예상하고, 그 예상을 벗어날 경우 충격을 받는다. 이 소설은 도입부에서부터 마지막까지, 심리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부터 원리를 이해할 수 없는 존재, 그리고 솔라리스까지, 화자는 경험과 이해를 넘어선 존재들과 사건들을 마주한다.
‘하레이’라는 인물은 흔하다면 흔하면서도 독특한 인물이다. 우리는 이미 다양한 종류의 로봇 영화들을 통해 비인간적 존재가 인간성을 가지고, 인간이 더 비인간적인 시나리오를 많이 봐 왔다. 하레이는 켈빈의 기억에 의존한 불완전한 복제품이나, 켈빈이 마주하는 인물 중 가장 인간적이다. 그에 반해 스나우트는 켈빈에게 피할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존재이고, 사르토리우스는 그의 내면을 최대한 숨기면서 이상적인 모습을 연기하는 존재이다.
하레이는 독립적인 존재로 자리잡을 뻔 했으나, 그 원본과 같이, 스스로의 결정으로 주인공의 곁을 떠나갔다. 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가치를 가지려 했으나 그렇지 못했다는 점에서, 솔라리스의 미모이드는 플라톤의 미메시스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Fig.3 Oasis, the masterplan
그리고 켈빈이 큰 감정적 동요를 겪는 장면을 보여 주고 솔라리스와 관련된 문헌을 나열하며 마치 솔라리스의 바다에 추락하는 것을 암시하지만, 솔라리스의 바다를 보고, 모든 것을 용서하고는 반추한다. 시계처럼 다시 돌아올 감정에 대해 공허함을 느끼고, 이 바다에 목적이 있을 거라 믿으며, 또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기대하며 삶을 이어간다.
어떤 사람들은 이 모든 인간사는 신의 계획masterplan이고, 이해할 수 없지만 어떤 목적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 소설의 후반부에서는 솔라리스의 바다의 행동을 인간, 또는 아이의 행동처럼 해석하고, 그리고 이해할 수는 없지만 목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류가 자연 현상에 인격을 부여했던 시절이 있었듯이, 솔라리스의 바다 또한 아직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인격을 부여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가 솔라리스의 바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물리법칙을 초월한 것처럼 보이는 그 능력과 재현성을 확인하기 어려운 현상, 그리고 그로부터 느낄 수 있는 공포와 숭고함 뿐이다.
Fig.4 Honne and tatemae
철학에서의 사고 실험은 극단적인 예시를 들어 논의를 꺼내듯이, 필자는 이 소설을 읽으며, 사람이 미지의 자연현상 또는 타인을 대하며 느끼는 감정과 태도, 그리고 사고방식에 대해 다루기 위해 미지의 행성과 극단적인 사람들, 그리고 미지의 존재를 사용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인류가 솔라리스의 바다를 보며 기존의 학설로 설명되지 않자 보이는 다양한 반응은 마치 고대 인류가 자연 현상에 인격을 부여하여 설명하는 것을 연상시켰고, 주인공이 스나우트, 사르토리우스를 보며 느끼는 감정과 반응은 우리가 입학, 입사 등 새로운 환경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보며 느끼는 감정을 연상시켰다.
타인은 미지의 존재다. 우리가 장대한 자연에 공포와 경이로움을 느끼면서도,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은 인간의 모습에 빗대어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타인, 즉 성장 배경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고 사고방식도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나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대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예상과 현실의 괴리에 다양한 감정을 느끼지만, 그런 감정과 관계없이 현실은 무심하게 다가온다. 자연 현상은 개인의 감정과는 관계없이 일어나고, 타인은 어디까지나 타인일 뿐, 내 감정은, 내 일은 나만의 일일 뿐이다.
Fig.5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하지만 모든 일이 감정과 무관하지는 않고, 감정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레이는 케빈의 과거의 망집이다. 하레이가 아닌, 케빈이 본 하레이의 투영이고 그 최후도 원본과 같았다. 마치 우리가 느닷없이 과거의 실수를 떠올리듯이, 과거의 나는 느닷없이 나를 찾아오고, 그 실수를 복기하면서 우리는 변할 것이다.
사람이 감정과 이성을 분리할 수는 없고, 감정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냉엄하게 다가오는 현실에 언제까지나 감정에 휘둘리는 것도 공허한 삶일 것이다. 냉엄하고 무감정한 현실에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살아간다는 것은 무언가에 대한 희망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게 마지막 독백의 의미가 아닐까 싶다.
참고문헌
S. W. Lem, 최성은, Transl., 솔라리스, 민음사, 2022.
오종환, 교양인을 위한 분석미학의 이해, 세창출판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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